터키 어느 아르메이아 장교의 슬픈 고백 2017/06/28 14:57 by Bogda Ejen

Gallipoli centenary marks another snub for Turkish minorities (al-Monitor)

기사의 내용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측의 비무슬림 군인들도 많은 사상자를 배출했음에도, 터키의 갈리폴리 전투 기념식에서는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는 내용. 예를 들어 유대인 커뮤니티는 자신들만의 추도식을 가진다고 한다. 다만 읽다보니 참 가슴아픈 대목이 있어서 한단락 인용해본다.



“오스만 군대의 비무슬림 가운데 아르메니아계 장교 사르키스 토로시얀Sarkis Torosyan이 있었다. 그는 유능한 장교로, 전투 가운데 전함 한척을 침몰시키고 다른 전함 하나에는 큰 타격을 준 공로로 훈장도 받았었다. 그러나, 그가 제국을 위해 싸우는 동안 그의 가족들은 학살당하고(Armenian genocide), 다른 친척들은 고향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친척들을 찾아 떠났고, 시리아의 캠프에서 여동생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일 토로시얀은 회고록에서 연합군이 다르다넬레스에서 승리했다면 가족들이 죽지 않았으리라 믿는다고 고백했다. 토로시얀의 이야기를 알린 아이한 악타르 교수는 오스만이 갈리폴리에서 패배했다면, 아르메니아 대학살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동생과 재회한 사르키스 토로시안

기타 YEEZY CALABASAS RUNNER 2017/06/22 15:43 by Bogda Ejen



2017년 2월 뉴욕패션위크에서 공개. 흰/베이지 색상은 이후 유출.
정식 명칭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고 대체로 이지 러너, 이지 700러너, 이지 칼라바사스 러너라고 부름.


터키 흑사병과 오스만 국가의 발전 2017/06/21 23:58 by Bogda Ejen

Uli Schamiloglu, “The Rise of the Ottoman Empire: The Black Death in Medieval Anatolia and its Impact on Turkish Civilization”, Views From the Edge, ed. Neguin Yavari, Lawrence G. Potter, and Jean-Marc Oppenhei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4), pp. 255-79.

오스만 국가가 아나톨리아의 일개 튀르크 공국에서 지역 제국으로 발돋움하는데 흑사병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가이다. 해당 에세이의 내용은 네 단락으로 나뉜다. 첫째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흑사병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고, 둘째는 14세기 흑사병에 대한 설명이다. 그 다음으로는 아나톨리아 튀르크 사회에 흑사병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나온다. 마지막 단락은 앞선 논의를 토대로, 흑사병이 오스만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가설’ 10가지를 서술했다. 다른 부분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기에, 10가지 가설 부분만 발췌·요약·번역하도록 하겠다.

1. 흑사병은 1347년 초반에 아나톨리아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전역의 도시와 지역 사회가 가래톳흑사병bubonic plague에 휩싸였다. 크림 반도를 통해 전래된 흑사병은 페라, 콘스탄티누폴리, 로마 제국의 해안 지방, 에게 도서 지방, 지중해, 로도스, 키프로스, 시스, 안티오키아, 알레포, 트레비존드, 티브릭, 마르딘, 디야르 바크르, 카라만, 카이사레아 등 많은 도시에 피해를 입혔다. 흑사병은 로마 제국 영토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니라, 튀르크계 공국들, 대아르메니아, 소아르메니아(킬리키아), 아제르바이잔 등과 아랍 지역 및 쿠르드 지역도 휩쓸었다.

2. 1347년 봄의 흑사병 창궐 이후 로마 제국은 위기에 빠졌고, 오스만 국가와 군사적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1352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오르한의 아들이자 그 자신의 사위인 쉴레이만을 아드리아누폴리로 불러들여 세르비아-불가리아 연합군에 맞서는 전력으로 활용했다. 흑사병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단독 전력으로는 그 위기에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쉴레이만은 발칸 반도에 진출할 수 있었음으로, 오스만 제국사의 분수령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이어진 1354년 3월의 지진을 통해 오스만인들은 쉬이 갈리폴리 성채를 얻을 수 있었고, 영구적으로 발칸 반도에 뿌리내렸다.

3. 오스만 국가 외의 튀르크 공국들은 흑사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카라스, 사루한, 아이든, 멘테셰, 테케, 카라만 등의 공국들은 대개 에게 해 연안 또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했었다. 흑사병은 대체로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퍼지는 경향이 있으며, 결코 인구 밀집 지역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당대 오스만 국가의 최대 경쟁자는 카라만과 에레트나로, 각각의 수도인 카라만과 티브릭(시바스에서 100km 정도 거리에 위치)는 흑사병에 큰 피해를 입었다.

4. 오스만 공국은 유목민의 비율이 높아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유목 사회에서의 흑사병은 정주 사회와 같이 쉬이 퍼져나가지 못했다. 인근 튀르크 공국들이나 로마 제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자연히 오스만 국가의 상대적 규모와 힘은 커졌다.

5. 남동부 유럽의 인구 감소가 오스만 국가의 확장에 이바지 했다. 15세기까지 흑사병이 발칸 반도를 휩쓸었다. 오스만 국가가 티마르 제도와 쉬르귄sürgün으로 알려진 인구 이주 정책을 채택한 것은, 로마 제국이 유스티니아누스 흑사병 이후 차츰 테마 제도를 발전시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6. 흑사병의 결과 콘스탄티누폴리의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그 결과 1453년 오스만 국가의 콘스탄티누폴리 정복 당시 그 인구는 3 ~ 5만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구 감소 추세는 오스만 정복 직후로도 얼마간 유지되었다.

7. 흑사병의 결과 아나톨리아의 그리스도교 사회는 쇠퇴하였다.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 왕국은 14세기 중반 멸망했다. 아나톨리아의 다른 그리스도교 집단들도 흑사병으로 인해 쇠퇴했다.

8. 1347년 이후에야 오스만 국가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경쟁자로 대두할 수 있었다. 1347년의 흑사병과 1354년의 갈리폴리 함락 이전 오스만 국가는 로마 제국과 비교될 체급이 되지 못했다.

9. 1347년 이후 성전의 논리가 아나톨리아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347년의 흑사병, 이에 따른 1352년의 발칸 진출, 1354년의 갈리폴리 점령이 이어지며, 오스만 국가는 로마 제국의 경쟁자가 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성전gaza”의 논리가 오스만 국가 내에서 피어났다.

10. 흑사병은 오스만 사료에서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여 주변 지역의 기록에서 유추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오스만의 사료에 충실한 오스만사 연구자들이 흑사병이란 요소를 오스만 국가의 발전에서 많이들 빠뜨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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